[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
[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
  • 최창민 기자
  • 승인 2017.08.29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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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괄편:역사가 쌓인 도시, 문화와 정신을 남기다
진주성 일대 사진=강진성기자


천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진주는 한국사에 지형적·문화적·정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도시다. 그 배경에 많은 유·무형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동안 역사적 가치에 비해 진주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백년 전 도청이 옮겨가면서 쇠락을 맞게 됐다. 1970~1980년대 각종 국가개발에도 배제되면서 진주는 ‘옛도시’에 머물렀다.

2007년 경남혁신도시를 유치하면서 진주는 변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비롯한 11개 공공기관 이전으로 도시에는 새 동력이 생겼다. 최대 공공기관인 LH는 서부경남에서 각종 사회공헌을 시작으로 지역문화 발굴과 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LH는 진주본사 사옥을 ‘천년나무’라는 콘셉트로 설계했다. 새로운 천년가치를 창출하고 천년역사 진주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의지에서다.

이번 공동기획은 LH가 지역역사와 문화를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지방지 효시인 경남일보와 함께 함께 진행하게 됐다. 역사·문화·인물 등 총 20편에 이르는 진주이야기를 선정해 독자께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린다. /편집자주

▲진주는 남강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한 청동기 유적을 통해 일찍부터 정치체가 발전했음이 확인된다. 1967년 남강댐 건설과 함께 처음 알려진 대평리 유적은 1995년부터 댐의 수위를 높이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됐다. 여기서 출토된 다량의 청동기 유물을 보존 소개하기 위해 2009년 진주 청동기문화 박물관이 건립됐다. 최근에는 남강댐 아래 평거 2지구 개발 과정에서도 유적이 발굴돼 그 일부가 공원으로 조성됐다.

진주는 삼한 시기 변한에 속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곳에 있던 소국의 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옥봉·수정봉 고분군 등을 통해 가야 시대까지 상당한 세력을 가진 정치체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옥봉·수정봉 고분군은 1910년에 발굴돼 유물이 모두 일본으로 반출됐고 지금은 고분 자리만 표시돼 있다.

한반도가 삼국으로 정립되면서 진주지역은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면서 신라 영토로 편입됐다.

진주가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685년 청주(菁州)를 설치한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이곳이 본래 거열성이었다고 적고 있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거창의 연혁이 잘못 기록된 것이다.

진주는 신라의 남해안 교통로를 관할하는 거점이었다. 한반도 남부의 간선 교통로는 남원에서 함양과 거창을 거쳐 합천이나 대구를 경유해 경주로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박을 이용해 해안을 따라 연결하는 경로도 있었다. 진주는 이 두 교통로를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경상도 고지도에 나타난 진주


신라가 9주를 정비하면서 그 하나가 됐고, 경덕왕 때 이름을 강주(康州)로 고쳤다.

신라말 지방 각지에서 성주들이 등장할 때 진주에는 강주장군 윤웅이 있었다. 그는 920년 고려에 귀순했다. 이에 진주 지역은 고려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나 928년 후백제의 기습공격으로 항복하면서 다시 후백제의 지배를 받았다. 견훤이 아들 양검을 강주도독으로 삼을 만큼 진주는 중요한 전략 요충이었다. 936년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진주는 다시 고려로 귀속됐다.

11세기 초 거란과 벌인 전쟁에는 진주 출신 인물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거란 성종이 개경을 함락했을 때 협상에 나서서 철군을 얻어냈으나 인질로 끌려가 순국한 하공진과 무장으로 거란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운 강민첨은 모두 진주 출신이다. 고려말 문익점과 함께 목화 재배에 기여한 정천익 또한 진주 출신이다. 이 세 성씨는 진주의 대표적인 토착 세력이었는데, 16세기 유학자인 주세붕은 ‘봉명루’라는 시에서 “땅은 신령하고 사람은 호걸이니 강·하·정이라”(地靈人傑姜河鄭)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고려에 들어와 비로소 진주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했다. 진주는 1018년 전국 주요 거점에 설치한 8개 목(牧)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전주·나주와 같은 권역에 속했으나 이후 경주·상주와 묶이면서 경상도를 구성하게 됐다.

무신집권기에는 최씨 정권의 2대 집권자인 최이의 식읍이 되어 한 때 그 세금이 최씨 가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 당시 진주는 진양으로도 불렸고, 최이 또한 진양공으로 호칭됐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진주의 위상은 변하지 않아 목관의 등급을 그대로 유지했다. 16세기 후반 성리학이 지방 사회에 뿌리를 내릴 때 진주를 기반으로 남명 조식을 계승한 학맥이 형성됐다. 이에 진주는 이황의 학풍이 남아 있는 안동과 함께 지금까지도 유교적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 조식의 학문은 ‘경의(敬義)’를 강조하며 실천을 중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선조 때 붕당이 나뉘면서 북인의 중추가 됐으나 정여립의 모반 사건에 최영경 등 조식의 제자들이 연루되면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인홍·곽재우 등 조식의 제자들은 의병을 일으켜 전란을 극복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에 힘입어 광해군 때 정치를 이끌었다.

인조반정으로 실각하면서 정치적으로 쇠퇴했지만, 조식의 학문은 진주를 중심으로 지역 학자들을 통해 계승됐다.

 
▲ 경상도 고지도에 표기된 진주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는 전쟁의 초기 판세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1592년 1차 전투에서는 김시민이 주민을 이끌고 일본군의 공격을 막냈다. 이로 인해 곡창 지대인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도 차질을 빚었고, 조선은 반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일본군은 정예군을 동원해 다시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황진과 최경회 등 지휘관들은 성을 사수하며 맞섰으나 결국 성이 함락돼 모두 순절했다.

진주성 안에 있는 창렬사는 이들을 제사하는 사당으로서 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헐리지 않고 남았다.

2차 진주성 전투와 관련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것이 의기 논개 이야기이다. 남강가 바위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논개는 천한 기생임에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점에서 충절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이 이야기는 전란 수습을 위해 지방을 순시하던 유몽인이 진주에서 들은 것을 ‘어우야담’에 수록하면서 전해지게 됐다.

논개가 실존 인물인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이후 많은 사람들이 논개를 감동적으로 기억했다. 진주 사람들은 이를 정부에 보고하며 표창을 요청했고, 마침내 영조는 그 충절을 공인한 뒤 사당을 지어주고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정표를 내렸다. 이후 논개 이야기는 내용이 점점 많아졌다. 그가 주씨이고 장수 출신이며, 원래 기생이 아니라 양가집 규수로서 최경회의 첩이었다는 이야기도 나타났다.

함양에는 논개의 무덤도 등장했다. 이렇게 뒤에 나온 이야기나 유적을 역사적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의기 논개를 기억했고 진주는 그러한 논개의 사적과 함께 했다. 그래서 지금도 진주하면 논개를 떠올리게 된다.

진주가 다시 한번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사건이 1862년의 농민 항쟁, 이른바 임술민란이다. 19세기 조선 사회는 이른바 삼정의 문란으로 기층 사회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생활이 궁핍해진 농민들은 결국 무력으로 뜻을 표출하기 시작했는데, 1862년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농민들의 봉기했다. 이것을 진주농민항쟁으로 대표해 부르기도 하는데, 진주의 봉기가 결정적인 도화선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진주에는 경상도 우병영이 있었다. 이곳의 책임자인 우병사 백낙신이 가렴주구(苛斂誅求: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음)를 일삼자 참다 못한 농민들이 무력으로 맞섰다. 이에 앞서 진주 인근의 단성에서 처음 농민들의 소요가 발생했는데, 진주에서는 더 규모가 크고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다. 정부는 사신을 보내 사태를 수습했지만, 이 봉기에 자극을 받아 각지에서 농민들이 무력 저항을 벌였다. 이렇게 분출된 기층 사회의 변혁 운동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이 됐다.

1896년 지방행정 개편으로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경상남도가 설치됐고 진주에 도청을 뒀다. 도청은 일제 하인 1925년에 부산으로 이전했다.

당시 진주에서는 격렬히 반발했지만 결국 도청 이전을 막지 못했다. 다만 부산이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일제하의 진주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형평운동이다. 형평운동은 그동안 천민으로 멸시를 받던 백정들이 권익 확보를 위해 벌인 운동이었다.

전통적인 중심지로서 양반가가 많았던 진주에는 이들에게 육류를 공급하는 백정들도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여전했다. 백정의 차별 철폐 운동은 교육 문제에서 시작됐다. 백정 출신으로 재산을 모은 이학찬은 백정 자녀에 대한 교육 차별에 맞서 강상호 등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형평사를 조직하고 1923년 4월 25일 창립 총회를 가졌다. 이렇게 시작한 형평운동은 진보적 사회운동으로 주목을 받아 각지에 지회를 설립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돋움했고 본부도 서울로 이전했다.

이후 분열과 통합의 굴곡을 겪으면서 사회적 역할을 늘려갔으나 1935년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면서 인권운동으로서 의미를 잃게 됐다.

한편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은 1983년 창원시로 이전했다. 진주는 도청을 되찾아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최근 제2청사가 설치됐다.

진주는 관내에 거점 국립대인 경상대학교와 진주교육대학교 등 6개 대학이 자리한 교육도시이자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는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진주 혁신도시의 건설로 LH공사를 비롯한 11개 공공기관이 이전해 경제도시로서 비중도 높여가고 있다.

 
▲ 한반도가 삼국으로 정립되면서 진주 지역은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고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면서 신라 영토로 편입됐다. 사진은 옥봉·수정봉 고분군 (조선고적도보) /사진제공=윤경진
 
윤경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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