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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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05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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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걸인과 기생의 3·1독립만세 운동
진주 걸인 기생 독립 만세운동 재현 모습으로 걸인과 기생으로 분장한 시민들이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진주는 경남도청 소재지였다. 경남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경남의 지도층과 유력 인사에서부터 걸인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 계층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나라의 독립을 외쳤다.

서울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돼 1919년 5월까지 줄기차게 계속됐고 진주 지역에서도 김재화(金在華)를 비롯하여 강달영(姜達永), 정준교(鄭準敎), 심두섭(沈斗燮), 이강우(李康雨) 등 지식 청년들에 의해 의거가 준비되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2월 말 고종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모습을 직접 보고는 독립 선언서와 격문을 가지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진주로 내려와 3월 10일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유인물로 만들어 인근의 각 면과 동리에 돌리고, 거사일을 장날인 3월 18일로 정했다.

당시 3월 20일자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18일에 진주군은 더욱 불온한 형세가 나타나서 군중이 3000여 명에 달하고 체포된 자가 86명에 미쳤는데’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처럼 대규모 군중들이 참가한 진주 3·1독립만세 운동은 의로운 정신으로 알려진 진주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당시 천대받았던 걸인과 기생들도 동참했다는 사실은 나라사랑에 신분의 귀천이 없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진주의 걸인과 기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은 ‘진주시사’와 ‘내 고장 전통’에서 기록해 놓았고 고은 시인이 시집 ‘만인보’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알려졌다.

‘진주시사’와 ‘내 고장 전통’에는 “기미년 3월 18일 진주의 걸인 100여 명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의분에 넘친 목소리로 ‘우리들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벌어먹는 것도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때문이며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000만의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다’라고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다음날(3월 19일) 오전에는 진주권번(기생조합) 소속 기생 5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 변을 돌아 촉석루까지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칼에 맞아 죽어도 나라가 독립되면 여한이 없겠다. 기생 김향화 등 5∼6명이 경찰에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등의 기록들이 있다.

이 뿐만 아니다. ‘부산경남 삼일 운동사’에는 “1919년 3월 18일(음력 2월17일) 진주장날 장터에서 하오 9시경에 진주의 걸인 100여 명의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나타나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 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의분에 넘친 어조(語調)로 ‘우리들이 유리걸식하게 된 것도 왜놈들이 우리의 재산과 인권을 빼앗아간 때문이며 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000만의 동포가 모두 빈곤의 구렁에 빠져 거지가 될 것이다’ 라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각종 기록들은 3·1독립만세 운동 당시 진주 걸인과 기생들의 동참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3·1독립만세 운동에 동참했던 기생들은 진주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었다. 기생조합은 나라가 망할 무렵에 교방이 해체되자 교방의 노기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뒤에 권번으로 그 맥이 이어진다. 진주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은 진주 교방의 맥을 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19년 3월 19일 한금화 비롯한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진주 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는데 한금화(韓錦花)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 라는 가사를 혈서로 썼다고 전해온다.

고은 시인도 만인보에 기생독립단에 대한 시를 남겼다.

-기생독립단-

평양기생 아미녀가 떨쳤지요

사나이들 뼈깨나 녹았지요

평양하고 비슷한 데가 진주성이지요

대동강하고 남강이 사촌이지요

진주기생조합 기생 50명이

기미년 3월 29일

자혜병원으로 정기검진 받으러 가던 중

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 외쳤지요

기생 김향화가 앞장서 외쳤지요

병원으로 가서도

검진 거부하고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외쳤지요

만세 부른 기생들 다 붙잡혀가서

김향화는 6개월 징역 받아 콩밥 먹었지요

기생들 꽃값 받아 영치금 넣었지요

면회 가서

언니 언니 하고 위로했지요

그럴 때마다

만세 주동자 김향화

아름다운 김향화 가로되

아무리 곤고할지라도

조선사람 불효자식한테는 술 따라도

왜놈에게는 술 주지 말고

권주가 부르지 말아라

언니 언니 걱정 말아요

우리도 춘삼월 독립군이어요.



이 시의 내용 중 1919년 3월 19일 진주에서 일어났던 진주기생 만세의거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있다. 우선 김향화라는 기생은 진주기생이 아니고 수원 기생이다. 관련내용도 수원 기생 만세의거를 노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월 31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생들이 만세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십구일 오전 11시 30분 경에 수원조합 기생 일동이 자혜병원으로 검사를 받기 위하여 들어갔다가,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몰려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서 앞으로도 나왔다가 해산했는데, 조합원 중에 김향화는 경찰서로 인치 취조하는 중이더라 한 것이 보인다.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 당시 매일신보 기사.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이라는 기사 제목이 눈이 띈다. 


진주 기생들의 만세의거 역시 당시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1919년 3월 25일자 기생이 앞서서 형세자못 불온이라는 기사에 십구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여섯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 라고 적혀있다.

이때 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진주에서만 있었던 일이 아니고 4월 2일에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정홍도, 이국희를 비롯한 예기조합 기생들이 금비녀, 금반지 등을 팔아 광목 4필반을 구입하여 만든 소복차림을 하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 맨 33인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3인이 붙잡혀 6개월 내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진주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의 3·1 만세의거는 색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진주 관기 논개가 왜장을 안고 순국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생은 나라로부터 대우를 받기보다 멸시를 당하던 신분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나라가 기생에게 베푼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나라를 팔아먹은 고관대작, 지식인들이 많았던 그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섰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1996년 2월 29일 진주 걸인 기생 독립만세운동을 재연해 냈다. 진주 걸인 기생 독립 만세운동 재현 모습.


진주기생들의 만세의거는 진주의 또 다른 역사로 전해오고 있다. 진주 문화를 생각하고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인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에서 1996년 2월 29일 망진산 봉수대 기공식을 마치고 4000여 시민이 6시부터 역사의 강인 남강 변에서 진주 걸인 기생 독립만세운동을 재연해 냈다.

이날 4000여 명의 시민들이 우렁차게 독립만세 구호를 외치는 가운데 역사를 간직한 채 도도히 흐르는 남강의 푸른 물결 위에 배를 띄웠다.

해양소년단의 선상 횃불시위가 시작되고 강변을 따라 시민들의 장엄한 횃불 행진이 이어지면서 그 행렬 길이가 2.5km에 달했으며 천수교 강변에서 천수교를 건너 촉석루 건너편∼진주교 아래∼경남문화예술회관 앞 야외 공연장까지의 모든 구간이 태극기를 휘두르는 ‘인간 띠’로 연결됐다.

또 남강에는 해양소년단의 선상 횃불시위대가 천수교에서 호국의 성지인 진주성 앞 강물을 따라 문화예술회관 앞 남강까지 행진하면서 1만세운동 당시 분연히 조국 독립만세를 외쳤던 걸인, 기생 독립단 등 선열들의 고귀한 넋을 기리고 그 정신을 되새기며 일본의 망언을 규탄했다.

이날 재연된 걸인, 기생 독립단은 잡초처럼 살면서 사회적 위치가 보잘 것 없었고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벌이지는 못했지만 조국독립에 대한 염원은 어느 누구 못지않게 숭고해 역사가들은 이러한 정신을 기려 ‘독립단’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행사는 지금도 이어져 오며 의로운 진주정신의 표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동욱(경상대학교 문학박사·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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