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경남일보 기획] 천년도시 진주의향기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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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1.1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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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의 교방문화
▲ 진주 교방문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의암별제 재현 모습. 진주민속예술보존회에서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진주 논개제 기간 중에 진주성에서 의암별제를 봉행하고 있다.



1910년 1월 7일자 경남일보에 위암 장지연은 진주의 정경과 문화를 노래한 ‘진양잡영(晋陽雜詠)’ 14수를 연재하면서 “풍부한 물산(豊産), 아름답고 요염한 기녀(娟妓), 무성한 대나무(竹蠅)를 진양삼절(晋陽三節)”이라고 했다.

일찍이 약 100년전 위암이 ‘진양삼절’ 중 하나라고 만천하에 알린 아름답고 요염한 진주 기녀. 바로 진주 교방문화의 주인공들이다.

진주의 풍류와 멋을 창출해낸 사람들인 것이다. 진주의 논개와 평양의 계월향으로 인해 절개와 풍류를 아울러 ‘남진주 북평양’이란 말이 회자 될 정도로 진주의 풍류와 멋은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조선 기녀하면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이능화(李能和)는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서 “지방에 따라 나름의 특색이 있었는데 평양기생이 그 숫자나 기예에서 가장 으뜸이었고, 다음이 진주기생으로 나와 있다. 의절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 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 계향(桂香, 蘭香), 매화(梅花), 진양의 옥선(玉仙) 등이 빼어난 명기(名妓)들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교방문화는 교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교방(敎坊)은 고려, 조선 시대 기녀(妓女)들을 중심으로 노래와 춤을 관장하던 기관이다.

 

▲ 진주 교방의 대표적인 교방무인 진주검무. 진주지방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검무로 1967년 1월 16일에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됐다.



교방청(敎坊廳)은 본래 중국 당나라 때 궁중 내에 설치됐던 것으로, 관기들과 악공들에게 가무악(歌舞樂)을 가르쳤던 곳이다. 이러한 중국 교방의 전통은 우리나라의 경우 발해를 거쳐 고려 문종 조에 도입됐고, 조선조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장악원(掌樂院) 소속의 좌방(左坊)과 우방(右坊)을 교방이라고 불렀다. 1458년(세조4)에 전악서(典樂署)를 장악원으로 개편하고 좌방과 우방을 두었는데, 좌방은 아악(雅樂)을, 우방은 속악을 맡게 했다.

또한 교방은 지방 관아에 부속된 건물로 대개는 관문 밖 객사 주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지방의 기녀들이 악기, 노래, 춤 등 각종 예기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 불려 다녔다.

진주 교방은 어디 있었을까. 진주의 인문지리지인 ‘진양지(晉陽誌)’ ‘관우(館宇)’조에 “중대청(中大廳) 동쪽과 서쪽에 낭청방(郞廳房)이 있고 서쪽 낭청방 앞에 교방(敎房)이 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중대청은 객사 건물로 안에 왕을 의미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고을 수령이 한 달에 두 번 배례를 올리던 곳으로 진주 비봉산 아래 고경리(古京里)에 있었던 건물이다.

진주 교방문화는 진주 사람들의 풍류와 멋에서 찾을 수 있지만, 우리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교방춤 뿐이다. 대부분의 진주 교방문화가 천하디 천한 기녀들의 생산물로 치부해 버려 그들의 문화적 산물은 거의 소멸되고 단지 교방춤 만이 전승돼 오고 있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교방춤은 오히려 교방청이 폐지된 이후, 지방으로 흩어졌던 관기들이 권번(券番)이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기방을 중심으로 추었던 춤으로부터 본격 발전됐다고 할 수 있다. 교방춤은 기방춤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과거 교방청의 궁중정재(宮中呈才)나 향악정재(鄕樂呈才)의 춤을 이어받기도 했지만, 지방의 무악(巫樂)과 같은 민속악에 맞추어 추는 민속춤을 가미하기도 했다.

오늘날 교방춤은 전문 예능의 무용으로서 춤의 예능을 전수받은 예능인들에 의해 공연되고 있으며, 이들 춤의 대부분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진주 검무, 진주 한량무, 진주 교방굿거리, 진주 포구락무 등 진주 교방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서예화에 뛰어난 진주 기녀들이 추었던 교방춤은 이제는 볼 수 없다. 다만 이들의 기예를 전승하고자 하는 예능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또 볼 수밖에 없다. 기예가 뛰어나 궁중 연회에까지 차출되었던 진주 기생 산홍이 추었던 진주 교방굿거리는 지금은 상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양삼절’의 하나인 진주 기녀는 한국 전통가무의 보존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을 말한다. 우리들이 세속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기녀들이 아닌 것이다.

 

▲ 진주 교방의 대표적인 교방무인 진주교방굿거리춤.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됐다.



전통 문화 예술의 계승자인 진주기녀들의 문화는 곧 진주 문화의 한 맥이다. 진주교방 문화의 흔적을 찾는 일은 진주 문화의 또 다른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모두 문화재로 지정된 진주 교방의 가무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그 어느 곳보다도 오랜 전통을 잘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진주 교방문화의 전통 계승은 ‘교방가요’라는 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후기, 즉 19세기 말 진주 교방청 기녀들이 어떤 노래를 불렀으며, 어떤 춤을 추었는가 하는 것을 상세히 전해주는 것이 바로 교방가요이다.

교방가요는 진주 목사를 지낸 정현석이란 사람이 1872년 편찬해 세상에 내놓은 책이다. 정현석은 1867년 진주 목사로 부임해 1870년 김해 부사로 떠날 때까지 3년간 진주에 있으면서 교방가요를 만들었다. 교방가요가 세상에 나온 것은 정현석이 김해부사로 있을 때지만, 그 내용은 주로 진주의 교방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정현석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1817년(순조 17년) 부친 정기화(鄭琦和)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초계(草溪)로 자는 보여(保汝), 호는 박원(璞園)이다. 24세 때인 1840년, 증광진사(增廣進士)에 합격을 하고 30세 때 음사(蔭仕)로 후 후릉참봉을 지냈다. 이후 내직으로 삼조(三曹)와 사부(四府)의 벼슬을 두루 거치고 외직으로 10번의 수령과 관찰사 1번을 지냈다.

1867년 정현석 목사가 부임한 당시 진주는 민심이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불과 5년전인 1862년 진주 농민들이 세도 정권의 부패와 비리에 항거해 봉기를 일으켜 민관이 서로 반목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정현석 목사는 왜 교방가요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바로 민심을 수습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자 하는 뜻에서 교방가요를 편찬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안한 시국 속에서 진주 사람들에게 민족적인 정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암별제’를 만드는 등 진주 교방의 가요를 정착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교방가요는 음악과 무용에 상당한 식견과 취미를 가진 진주목사 정현석이 진주의 민심과 풍속을 바로잡고 교방의 가요를 정착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정현석 목사는 무척 바빴을 것이다. 공무를 보면서 틈틈이 교방가요를 편찬하다보니 진주에서 완성하지 못하고 부득이 다음 임지인 김해에서 책을 출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방가요 목차는 ‘총목’과 ‘무(舞)’로 나누어져 있다. 총목은 우조(羽調) 계면(界面) 잡가(雜歌) 시조(時調) 부분으로 돼있다.

무는 육화대(六花臺(附鶴舞)) 연화대(蓮花臺) 헌선도(獻仙桃) 고무(鼓舞) 포구락(抛毬樂) 검무(劍舞) 선락(船樂) 항장무(項莊舞) 의암가무(義巖歌舞) 아박무(牙拍舞) 향발무 황창무(黃昌舞) 처용무(處容舞) 승무(僧舞)부분으로 돼 있다.

정현석 교방가요의 백미는 바로 ‘의암가무(義巖歌舞)’라고 하는 ‘의암별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의암별제는 모두 기녀들로만 진행됐다. 초헌관을 비롯해 아헌관과 종헌관은 신망 있는 늙은 기녀 중에서 뽑고 당상과 당하의 집례는 글을 아는 기녀를 선임했다. 그 밖에도 대축 전사관을 비롯해 동서찬자, 알자, 사준, 봉작, 봉향, 봉려, 가자 8인, 무인 12인과 당상악공 5명, 당하악공 6명이 제례를 집행하는 등 의암별제는 대규모적인 국악의 향연이었다. 현재 의암별제는 진주 논개제의 제례의식 행사로 매년 진주성에서 봉행되고 있다. 교방가요에 실린 내용을 참고하여 옛 모습을 제대로 복원한다면 우리나라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을 진주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정현석 목사는 교방가요 서문에 “내가 진양에서 김해에 부임하고 나서 집무를 보는 중에 여가가 많아 교방을 설치해 가무를 익히게 하고 가요 가운데 채록할 만한 것을 추려 약간 수의 시구를 만들었다. 혹은 시구가 촉급(促及)해 말이 남기도 하고 혹은 말이 짧아 글자를 부연하기도 하여, 그 본지를 잃지 않도록 유의했으나 오음청탁(五音淸濁)에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다. 다만 성정(性情)의 바른 것만을 가려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한 말은 모두 버려 스스로 써야할 것은 쓰고 지워야 할 것은 지우고 그 사이에 권선징악의 뜻을 붙인다”라고 했다.

정현석 목사는 이글에서 교방가요를 지은 뜻을 밝히고 있다. 사람 마음속에서 바른 것만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한 것은 모두 버려 권선징악의 뜻을 담은 것이다. 곧 진주 기녀들에게 바른 마음을 기르도록 해 진주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음악과 춤을 전하고자 하는 정현석 목사의 뜻이 교방가요에 담겨 있다.

교방문화는 진주 문화의 한 맥(脈)이다. 옛날 진주목 관아 근처 교방에서 진주의 풍류와 멋을 창출해 낸 주인공들은 바로 진주 교방 사람들, 즉 기녀와 악사들이다. 엄격한 유교문화 질서 속에서 신분적으로 천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지켜온 것이다. 그러다가 교방문화는 일제 때 들어온 ‘유곽’ 즉 창기들로 인해 그 본래의 모습을 잃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지 그들의 흔적이라고는 애틋한 사랑을 담은 문학작품 그리고 춤과 노래가 ‘교방무’ ‘교방가요’ 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강동욱
▶필자약력
경상대학교 문학박사
진주교육대학교강사
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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