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산골의 옛 대보름 풍경
이덕대(수필가)
어느 산골의 옛 대보름 풍경
이덕대(수필가)
  • 경남일보
  • 승인 2018.02.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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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대

흥무산 위로 정월 대보름달이 떠오른다. 냇가 논 가운데 커다란 달집이 지어지고 가오리연, 방패연이 가운데 솟아있는 높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농염하게 타오르는 짚불과 연기를 따라 우쭐우쭐 춤을 춘다. 상쇠 어른은 지신밟기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연신 ‘꽹매꽹매’ 소리를 먹인다. 집집마다 돌며 액운과 잡귀신을 몰아내고 풍년과 복을 빌며 지신에게 비손하다보니 조이 몇 되 술을 얻어 마신 선소리 양반은 불콰한 얼굴로 소북을 정신없이 두드리고 돌리며 돌개바람처럼 춤을 춘다. 동네 어른들의 환호성이 터진다. 더욱 신이 난 벅구잡이 아재는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넣어가며 돌아간다.

올해도 여지없이 옆집 속곳을 얻어다가 일 년에 한번 펴는 비단요 밑에 넣어두고 조심스럽게 부부성을 쌓았던 이는 떡 시루와 막걸리 말을 내고서야 불타는 달집에 맨 먼저 그 속곳을 던져 넣는다. 아들 많은 집 아낙 것을 얻어다 입고 달집에 태운 뒤 간절히 빌면 아들을 얻는다니 부끄럽지만 작년이어 그 방법을 또 쓴다.

아이들은 대보름달을 먼저 보려고 동산으로 올라가 이리 저리 뛴다. 커다란 보름달이 소나무 가지에 걸리듯 둥근 머리를 내민다. 처녀 총각들도 은근히 눈을 맞춘다. 몸이 간지럽다. 달집이 다 타고나면 그들은 마을 전방에 모여서 과자를 사먹으며 군것질을 할 것이다. 총각들도 말은 안 해도 은근슬쩍 가겠다는 눈치가 오간다. 그새 달이 둥실 떠올라 청춘남녀의 발그레한 얼굴도 알아 볼만큼 환해졌다. 정월 대보름 밤 풍경이 살짝 부끄럽다.

뻥 뻐엉 대나무 튀는 소리에 놀란 아이들은 치마 뒤로 숨고 어른들은 떠오르는 달을 보며 저마다 한 마디씩 덕담을 하고 소원을 빈다. 청솔가지와 대나무를 기둥삼아 집집마다 추렴한 짚으로 만든 달집도 거의 다 탔다. 농악대 풍물놀이도 점점 잦아든다.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옆으로 불어 머리카락과 눈썹을 태운 아이들은 마치 머리 부스럼 만지듯이 불탄 자국을 만지며 어른들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간다. 보름간의 설도 그렇게 저문다. 설은 나가서 쇠어도 보름은 집에서 지내야한다는 옛말이 틀린 게 아니다. 환한 보름달 아래 한바탕 동네잔치가 마무리 된다. 시골 인심은 정월 대보름 인심이 최고다. 타성바지 세 집 오곡밥을 얻어다 먹었으니 잔병치레 없이 무탈하게 일 년을 넘길 것이다. 대나무 폭음소리에 악귀도 쫓겨났을 터이고 타던 달집이 동쪽으로 쓰러졌으니 올해도 풍년이 들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어느 산골의 정월 대보름 풍경이 우리 곁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이덕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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