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춘추]잃어버린 것으로부터의 재 탄생
[경일춘추]잃어버린 것으로부터의 재 탄생
  • 경남일보
  • 승인 2024.05.08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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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영 시인
유승영 시인


기어코 잃어버리고 말았다. 경산역에 다다랐을 때까지 꿀잠을 잤던 것이다. 꿀잠이란 엄마가 자꾸만 깨워서 꿀잠이라던 학생이 생각이 났다. 나는 그렇게 무릎에 덮고 있던 블랙 가디건을 그대로 흘려버리고 기차에서 내렸다. 얼마나 꿀잠을 잤던 건지 홀가분하기까지 했다. 나의 가디건은 주인을 잃은 채 경산역을 떠났고 조금 전 꿈나라에 있던 내가 배낭과 강의안만 들고 아주 가볍게 기차에서 내렸다. 아침에 출발지에서도 한 번 떨어뜨려 누군가 주워줬는데, 경산역에는 분실물 신고된 것이 없고 종착역인 동대구역에도 없었다. 가디건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언제나 새것처럼 은펄감이 있는 가볍고도 따뜻한 블랙가디건. 어디에서도 사랑받을 블랙 가디건을 잊는데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아끼고 끝까지 함께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자주 만나지는 사람, 자주 입어지는 옷이 있는가 하면 값을 제법 치르고도 유행이 지나도록 한두 번 입어질까 말까 하는 옷도 있다. 많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지만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만으로 족한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고 오는 것에 대해, 문득 이별에 대해, 이별의 아픔 말고 이별의 능력을 생각해 보았다. 졸다가 놓친 것들에 대하여, 여기에 오기까지 내 시간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오월이다.

내가 시를 쓰는 경우도 이 지점을 통과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잊기 위한 몸부림 같은 거, 다시 말하자면 아껴놓았던 것을 손끝으로 살려내는 일, 내가 살아낸 상처들을 봉합하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분명한 대로, 불분명한 것은 불분명한 대로 그 불가피성을 설득해 나가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음악의 경우도 그렇다. 문학으로서의 발라드를 보자. 이것도 잊고 지냈던 기억의 서사였으나 손끝으로 만져지고 다듬어져서 한 편의 노래가 되고 댄스가 되고 트로트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센티멘털이 다듬어져서 서사가 되었듯이, 우리들의 얼큰한 이야기가 트로트가 되었듯이, 우리들의 희노애락은 잃어버렸던 것으로부터의 조합이고, 잃어버린 것으로부터의 재생산이다. 잃어버린 것으로부터의 기억들과 그 기억의 조각들이 살아나서 시가 만들어지고 음악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처음의 그것과 사뭇 다르지만 이전의 것과 흡사해서 새로운 만족감을 얻는 일, 다시 말해서 창조하는 일은 잃어버린 것으로부터의 시작이 아닐까. 다음 역은 경산, 경산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잃어버린 물건 없이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새로운 오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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