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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이지 않는 경일혼, 불사조의 꿈을 꾼다

기사승인 2018.10.12  17:4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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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일보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나라가 풍전등화 같았던 시절에 태어나 일제와 군사정권으로부터 ‘말뚝활자’와 정간, 그리고 폐간을 수없이 당했음에도 다시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초의 지방지로서 향토의 횃불로 그 역할을 다해온 경남일보의 역사를 창간 109년을 즈음하여 단편형식으로 되짚어 본다.
 
   
▲ 중창간 10주년 마진 역전마라톤:1956년 3월 1일 중창간 10주년을 맞아 개최한 제1회 마산~진주 역전마라톤대회에 구경 나온 주민들. 이 대회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됐다.


평양·대구는 신문발행의 꿈, 진주에서 최초로 이뤄내

나라가 일제의 침략으로 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애국지사들은 직접 총칼을 들고 무력투쟁을 벌이는 한편 교육을 통해 실력을 양성하거나 언론활동을 통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09년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주요 도시에서 일본인들이 20여종에 이르는 신문을 지방에서 간행하였으나 우리나라 사람이 지방신문을 발행하는 곳은 없었다. 1906년 평양에서 신문사를 설립하고자 당시 2000원을 모금하여 추진하였으나 실패했고, 대구에서는 신문발행 인가까지 받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진주에서도 개화에 눈을 뜬 선각자들을 중심으로 1908년 말 신문 간행 논의를 시작, 1909년 2월에 경남일보주식회사가 발기되고 주주 500명에 600주(주당 50원) 발행해 일부 자금이 모아지자 신문을 발행하게 된다.

변방에서 전국으로 쏘아올린 배달망, 해외까지 단숨에

일간 형식을 취한 경남일보는 창간호를 발간한 뒤 초창기의 각종 설비의 고장으로 휴간을 반복 하다가 1910년 격일제로 간행형식을 변경한다. 창간초기 8000부를 발간하여 경남도내 5550여 동리에 1부씩 발송하고 개인과 기관 구독자와 전국 140여 곳에 배부하였으며 일본과 중국에도 우송했다. 1908년 서울에서 발행되는 제국신문이 2500부, 황성신문 3000부, 대한매일신보가 국·한문판과 국문판을 합쳐 8000부를 발간했다. 격일제로 간행되는 1910년 들어 2689부로 발행부수를 줄여 경영난 타개에 나선다. 광고는 서울 소재의 서점과 책, 서울 소재의 약방 광고 등을 게재했다. 광고의 전국화 등으로 사세가 확장되면서 경영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1910년 6월 21일자로 제100호를 발간하고 신축 사옥 낙성식도 갖는다.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한 단호함, 일제는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별이 옮겨지니/구중궁궐은 침침하여 햇살이 더디 드네/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구슬 같은 눈물이 종이 가닥을 적시네 -매천 황매선생의 절필 4장 중 3장.
매천 황현 선생은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당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1910년 8월 경술국치을 당하자 그해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일본인 경남도장관이 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이 소식과 함께 절필 4장을 게재해 일제로부터 정간 당한다. 이에 앞서 1월에는 ‘告大韓人 各新聞社(고대한인 각 신문사)’이라는 사설 전문이 일제 검열에 의해 말뚝활자로 검게 인쇄되기도 하는 등 수난을 수없이 당한다.

창간 초기부터 시달린 경영난 속 각계각층의 기부금은 큰 힘

경남일보 주식회사는 자본금 3만원으로 하고 1차로 1만5000원을 청약 받는다는 야심찬 목표를 설정하였으나 실제 납부된 주식대금은 창간한 지 45일이 넘도록 미미해 심각한 재정난에 직면하게 된다. 1909년 11월 30일자 사설을 통해 임직원 보수도 한 푼 지급 못하고 자재와 우송료 부담으로 더 이상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발행 목적을 영리에 두지 않고 애국계몽운동을 자천한데다 설립초기 설비의 잦은 고장과 재정난이 겹쳤다. 딱한 사정이 알려지자 기부금이 답지했다. 동래 정정여학교, 동래부 초량의 노동야학교, 당시 김기태 부사장의 조모 정부인, 창원 웅읍면장, 고성 대성학교장을 비롯해 하동, 함양, 진해, 함안, 남해 등지에서 기부금이 답지해 경영정상화에 큰 도움이 된다.

 
   
▲ :1910년 경남일보 부설 야학교가 설립되어 장지연 초대 주필이 직접 강연에 나서고 강연 내용을 신문에 게재하여 일본에 빌붙어 나라를 판 무리들을 ‘돼지보다 못한 무리’리고 통박라며 항일정신을 가르쳤다. 야학과정을 수료한 학생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장지연 주필(둘째줄 오른쪽에서 여섯번째)

실학과 민족의식 고취의 정신으로 야학을 세워 펼친 배움의 장

을사늑약 직전 경남은 2부 27개 군 458면 5410개 동 29만1597호에 136만4899명이었다. 학교는 종교·사립학교를 포함 245곳이었다. 185만명의 평안도는 850곳에 비해 초라한 수준이었다. 경남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계몽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교육에 투자한다. 교육휘보라는 고정란을 마련해 새 교육의 중요성과 보급운동에 앞장선다. 1910년 11월 야학원 모집광고와 민지개발의 실천을 천명한 기사를 통해 학생들을 모집하고 경남일보 사내에 야학교를 설립, 같은 달 14일 입학식을 연다. 장지연 주필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라를 좀 먹고 국민을 병들게 하는 무리’들을 질타하며 애국심을 심어, 경남일보 부설 야학교는 애국심 함양의 도장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창간주역들은 각지서 학교를 설립한다.

일제·신군부의 강제폐간과 꺾이지 않는 경일혼으로 부활한 경남일보

1915년 1월 단 한 차례의 신문을 찍어내고 경남일보는 깊은 잠에 들어간다. 경남일보의 폐간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으며 언론들도 침묵한다. 일제는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강제 폐간 때도 자진 폐간 형식을 취했으며 철저한 보도관제가 뒤따랐다. 1980년 신군부 세력에 의한 두 번째 강제 폐간 때도 ‘한국신문협회 자율결의’라는 미명 하에 강제 폐간된다. 광복 후 민주진영 지도자들의 의기가 투합, 1946년 3월 1일 ‘반공·반독재·반부패’의 사시를 기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중창간일을 3월 1일로 잡은 것은 3·1정신을 계승하고 위암 장지연의 항일 정신을 이어 나가겠다는 표현이었다.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던 경남일보는 1989년 유사제호라는 이유로 신경남일보로 발행했다가 2000년 ‘신’자를 떼고 원래 이름을 되찾는다.

 
   
▲ 중창간 10주년 마진 역전마라톤:1956년 3월 1일 중창간 10주년을 맞아 개최한 제1회 마산~진주 역전마라톤대회에 구경 나온 주민들. 이 대회는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됐다.

한국전쟁과 반독재 타도…현장을 뛰는 보도는 수난과 함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문화유격대를 만들어 지리산에서 삐라형식으로 신문을 만드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수포로 돌아간다. 진주가 수복되자 신문사가 불타고 없는 상황에서도 신문을 발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삼천포, 함양, 김해 등지에서 주인이 없는 활자와 인쇄기계를 빌려 신문을 발간, 전선의 상황을 시시각각 보도한다. 1951년 7월 지리산 주변 빨치산 토벌 현장에 본사 기자를 특파하기도 했다. 경남일보는 1952년 부산정치파동 이후로 이승만정권과 각을 세워며 발췌개헌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이박사 하야설의 의당성’이라는 사설을 통해 이 대통령의 은퇴를 주장한다. 이로 인해 군복과 평복을 입은 괴한들에 의해 경남일보 공무국이 습격당해 쑥대밭으로 변하는 수난을 당한다.

개천예술제, 역전마라톤, 중학야구대회…지역민과 함께 한 109년

경남일보는 경영난을 극복과 지역발전 사업을 펼친다. 초창기부터 서적 등 인쇄사업에 주력, 외간물이 늘어나자 시설을 확충한다. 1949년 11월 제1회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가 당시 경남일보의 설창수 주필이 모든 일을 총괄하고 박세제 중역진(10, 11대 사장) 등이 깊숙이 관여함으로써 경남일보 전 직원이 동원되다시피 했으며, 1~11회까지 경비도 거의 경남일보에서 제공했다. 이 외에도 콩쿨대회, 마산진주역전마라톤대회, 아시아민속예술미인대회, 전국 중학야구대회, 직장 친선축구대회, 경남단축마라톤대회, 바둑대회, 다방 에지스터 인기투표 등을 개최한다. 지면을 통해서는 1963년 경남 전남 전북 4개 시 17개 군이 참여하는 서남지구 간담회를 개최해 진주 도청환원운동을 비롯해 진주공원 골프장 설치 반대 등 여론을 선도했으며,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등의 특종을 낸다.

박도준 djp1@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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